이주노동자방송국의 사회적 위상과 역할

December 6, 2007

들어가는 말

 

독일에서 생활할 때의 일이다. 베를린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 보면 어떤 칸에는 외국인이 대부분이고 독일인은 단 몇 명만 타고 있는 경우가 있다. 모처럼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동료를 만난 외국인들은 당연히 큰소리로 모국어로 대화하면서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이 순간만큼은 자신들이 타고 있는 지하철 한 칸이 터키이고 나이지리아이고 한국이 된다. 이 때 주고 받는 대화의 내용은 외국인으로서 부당하게 대우받았던 경험의 공유, 외국 생활에서 꼭 필요한 정보, 독일의 법제도에 관한 정보 등 매우 다양하다. 모국어로 대화를 주고 받는 순간 낯선 땅에서 잠깐 동안이라도 숨을 쉴 수 있게 된다.

 

이주노동자방송국은 이처럼 낯선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주민들을 위한 해방 공간의 역할을 하기 위해 만들어 졌다. 처음 방송국에 대해 구상하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이주노동자나 이주민 문제가 메인페이지 탑으로 항상 오를 수 있는 미디어를 만들고 싶은 이유였다. 신문지면에서 이주민 문제가 탑으로 올라온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주민 문제가 언론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집중 조명되어 사회적 관심을 받은 것은 아마도 지난 2월 11일 발생한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 사건이 최초인 것 같다. 이주민 문제는 10명의 아까운 목숨 정도는 담보로 하여야 신문 지면의 명당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이주노동자나 이주여성은 방송과 언론에서 사용하고 있는 전문 언어와 문장 구조를 이해할 수 없다. 짧게는 몇 십초 안에 길어야 2-3분 안에 영상과 함께 쏟아져 나오는 숙련된 기자들의 언어를 이주노동자의 입장에서는 단 10%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숙소에서 저녁 식사를 하면서 보는 저녁 뉴스에서는 마치 고속철이 달려가는 듯 무서운 속도로 많은 정보들이 스쳐 지나간다. 이주민이나 이주노동자와 관련된 뉴스가 나오면 자신보다 더 한국어 실력이 있는 주변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방금 나온 저녁 뉴스에서 이런 화면이 나왔는데, 그게 어떤 내용이었냐고 묻는다. 한국어에 서툴러 자신과 깊은 연관이 있고 때로는 한국에서의 삶을 지탱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는 중요한 정보에서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이주민과 이주노동자 당사자에게는 모국어로 100% 이해할 수 있는 정보가 그만큼 절실하다.

 

이주노동자방송국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는 몇 가지 요소가 있다. 우선 정보로부터 소외된 소수언어를 사용하는 규모가 작은 집단들이 주도하여 펼치는 정보 소통의 창구 역할, 두 번째는 주류 언론과는 다른 시각과 입장에서 이주민 뉴스를 생산하여 이주민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는 독립적인 대안 미디어의 역할, 세 번째는 내국인들이 이주민에 대하여 갖고 있는 편견과 선입견을 교정하는 다소 계몽주의적인 역할이다.

 

본 발제에서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이주민 대안 미디어 이주노동자방송국의 이 세 가지 성격을 한국의 이주노동자 운동의 상황의 연관성 안에서 설명하여 볼 예정이다.

 

17년의 이주민운동, 정보운동은 제 자리 걸음

 

국내에 이주노동자 운동은 1995년 네팔 산업연수생들이 명동성당 앞에서 자신의 몸에 쇠사슬을 감고 처절하게 ‘이주노동자도 인간이다, 제발 때리지 말라’고 한국 사회를 향해 외치면서 비로소 시작되었다. 이를 계기로 지원단체들이 생겼고 이들이 이후 10여 년 동안 한국의 이주노동자 운동을 이끌어 왔다. 이주노동자가 주체가 된 단체로는 1992년부터 이미 존재했던 국가별 공동체가 있고, 또 2001년 평등노조 이주지부로 시작되어 2005년 이주노동자의 단독 조직으로 발전한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 있다. 이 밖에도 2000년대 초부터 증가하기 시작한 국제결혼으로 한국으로 이주한 이주여성의 시민권을 확보하고 다문화 가정을 지원하는 이주여성 상담소들이 생겼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시민사회단체에 대한 지원이 늘어났고 이주노동자 지원단체 또한 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게 되면서, 그 수가 급증하게 된다. 2005년 이주노동자방송국을 개국할 때 150여개였던 지원단체가 채 2년이 안된 2007년 현재 500개를 넘어섰다고 한다. 지원단체의 사업은 주로 다문화 가정 배우자와 아동의 문제, 이주민 축제 등의 문화행사, 귀환프로그램, 이주노동자 노동상담, 선교 등의 활동이다. 지난 해 구로동을 시작으로 정부로부터 수십억대의 지원금을 받아 의정부, 창원 등의 순서로 생기고 있는 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는 이제 이주노동자 지원단체들이 재정적으로는 안정적인 운영 궤도에 올랐음을 말해주고 있다.

 

반면 이주노동자의 노동 권리를 주장하며 지난 2005년 4월 깃발을 올린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은 순탄치 못한 길을 걷고 있다. 2005년 4월 초대 위원장 아노아르 후세인이 출입국에 의해 표적 단속 당하여 청주 외국인 보호소에서 1년간 수감되었다가 일시보호해제로 풀려났으나 체류연장 불허와 정신 후휴장해 등의 어려움으로 자신의 고향으로 귀국했다. 2007년 11월에는 까지만 위원장을 비롯한 이주노조 3기 집행부 3인이 같은 날 다른 장소에서 거의 같은 시각에 연이어 표적 단속 당하여 현재 청주 외국인 보호소에 수감 중이다.

 

1992년부터 생기기 시작한 이주노동자들의 자생적인 국가 공동체 또한 그 수가 늘어났다. 그러나 전체 40만 이주노동자 중 절반이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신분으로 활동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공동체의 활동이 온전한 자생력을 갖긴 어렵다. 대부분의 공동체들은 이주민 센터에 속해있거나 연대하여 활동한다.

 

이주노동자 관련 단체들 중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것은 선교와 노동상담을 함께 하고 있는 지원센터들이다. 실재로 어떤 선교 센터의 경우는 이주민 지원사업을 하는 동시에 함께 예배를 보고 또 재능이 있는 노동자를 교육하여 본국의 선교사로 파견하는 일도 하고 있다. 이런 단체의 경우 더욱 정부 친화적인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선교와 포교는 모든 종교의 본질이긴 하지만 다른 종교 문화를 갖고 한국으로 이주하여 어려움에 처한 이주민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개종에 대한 권유 자체가 폭력적일 수 도 있다.

 

현재 정부가 구상 중인 외국인 정책 전달의 체계를 살펴보면 상부에 외국인정책위원회가 주요 정책의 심의와 조정을 하고, 그 밑으로 출입국 외국인 정책 본부와 각 부처가 협력하여 정책 입안과 검토, 소관 업무를 수행하고, 아래로 외국인의 집, 외국인 지원단체, 가정폭력 상담소 등 민간단체와 고용안정지원센터, 노동사무소, 교육청, 법률구조공단 등 일선 기관 및 산하단체 지부를 두어 민원대행과 통보를 하도록 하고 있다. 이 구상안에서 외국인 이주민들은 상담을 받고 정책을 전달받는 역할로만 그려져 있다. 

 

정부의 외국인 정책 전달 체계에서 살펴보았듯이 대부분의 정보가 민간단체와 기관을 통해 이주민에게 전달된다. 중요한 정보들이 곧장 이주노동자 공동체와 단체에게 전달되지는 않는다. 이주민과 관련된 정책에 대한 정보가 우선적으로 한국인의 손을 거쳐야 이주민에게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정책을 책임지는 기관의 입장에서는 업무의 편의를 위해서라도 도표를 그리듯 명확한 전달체계가 필요할 것이다.

 

정보의 그물망에는 모두 한국인 배달부가 있으며, 이주민 당사자들은 정보 전달의 주체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영원한 손님으로만 머물게 된다. 관련 기관과 단체들이 이주민 관련 정보를 소통하는 방식은 쌍방향적이기 어렵다. 또 이 정보들은 관에서 사용하는 한국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관련 정책을 입안하고 행정실무를 맡은 기관은 한국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주민들을 위한 다국어 안내문을 특별히 준비하지는 않는다.

 

이주노동자방송국이 광장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운영 방식도 기존의

이주노동자 관련 기관과 지원단체에서 폐쇄적으로 운영하던 것을

전면적으로 거부합니다. 정보는 모두에게 공유될 수 있고 접근

가능해야 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민주주의입니다.

-이주노동자방송국 제안서 중에서 2004년 11월

 

지난 11월 6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독일의 이민정책과 한국인의 독일 이주사례’ 포럼에서 법무부 사회통합과의 차용호 사무관이 발제자로 참여하여 정부의 이주정책에 대해 발표하였다. 차 사무관은 지난 9월, 2년 이상 한국에 체류한 전국 결혼이민자 109명 대상 한국어 필기시험에서 평균성적이 46.4점이었고 베트남 국적의 결혼 이민자의 경우 28.6점으로 매우 저조하게 나왔다고 발표했다. 이들 중 7명은 0점이 나와 단 한문제도 맞추지 못해, 조사 대상에 참여한 결혼 이민자 중 35명은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것으로 결과가 나왔다고 했다. 이 결과만 보아도 대부분의 결혼 이민자들이 한국어로 된 정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법무부는 이 시험 결과에 충격을 받고 결혼 이민자를 위한 다국어 정보의 확대가 아니라 결혼이민자가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자 할 경우 귀화필기시험을 실시하는 쪽으로 정책의 방향을 바꾸었다고 한다.

 

내가 베를린 한인회에서 사무장으로 일할 때의 일이다. 독일의 전 지역에 걸쳐 한인회가 있지만 베를린 한인회가 유일하게 하는 일이 있었다. 바로 매달 발행하는 한인회보다. 한인회보에는 한국의 주요한 뉴스와 한인들이 직접 쓴 글들이 실렸다. 매월 초면 한인회 간부들은 방금 인쇄소에서 나온 회보를 정성스럽게 봉투에 넣고 전국의 한인 독자들의 주소를 우편번호 별로 분류하여 직접 끈으로 묶어 정리하여 우체국에 가져가서 발송했다. 이 회보지 발행은 사실 상 한인회의 가장 주요한 사업 중의 하나였다. 물론 그 때 이미 인터넷으로 한국의 소식을 접하고 있던 내게는 굳이 이미 다 알려진 뉴스를 돈을 들여 인쇄하여 힘들게 배포하는 이유를 진심으로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분들은 60년대와 70년대 광부와 간호사로 가신 분들이다. 이 분들 중에는 독일어를 유창하게 하여 소통에 전혀 어려움이 없는 분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한인들은 독일에서 나고 자란 2세가 아닌 이상 독일 사회의 중요한 정보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할 만큼의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다문화 사회 안에서의 소통의 문제는 결국 소수의 언어를 사용하는 그룹을 인정하는데 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예로 유태인 출신의 옛 교우가 나에게 자신의 가족사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3대 째 살고 있는데 자신의 할아버지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유태인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에서 모든 것을 해결한다. 생필품을 구입하고, 여가시간에 친구들과 만나고, 법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 유태인 변호사를 찾아가고, 병에 걸렸을 때는 유태인 의사가 있는 병원을 찾고, 자신의 모국어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지만 영주권을 갖고 일반 미국 시민들과 동등하게 대우받는다.

 

한국 정부는 현재 다문화와 관련하여서는 ‘사회통합’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고액투자가들에게는 국적 취득 시 필기시험과 사회통합프로그램 이수를 면제해주고 있지만, 결혼을 통해 이주한 이주여성들에게는 ‘한국어 배우지 않으면 체류권을 주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 이주여성들이 ‘한국 사회를 소통의 위기로 몰아갈 수 없는 위험한 존재’ 인 것이다. 남편과 시댁 식구들의 동행 없이는 바깥 외출이 어려운 상황, 한국어를 모르기 때문에 어디에 가야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 또 농촌에서는 가사일과 노동일을 모두 부담해야 한다는 사실은 정부의 관심 밖의 일이다.

 

이주노동자방송국은 이주민과 관련단체들이 그들의 정보를 외부와 교류할 수 있는 창구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 특히 오는 12월 7일 다국어 사이트 개국을 통해 그 동안 한국어에 능숙하지 못해 정보에서 소외당했던 이주민과 이주노동자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할 예정이다

 

이주민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는 대안 미디어

 

이주노동자방송국은 주류사회로부터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소외된 이주민 당사자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주류 사회 안에서 이들의 문제가 어떻게 의제로 설정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고민하는 대안 미디어다.

 

사회운동과 공동체에서의 의제설정과 이슈개발에 가능한 한 폭넓은

범위의 참여를 독려함으로써 사회생활의 다양한 현실을 반영하고,

정당과 인텔리겐지아로부터 자유로우며, 운동을 우선시하고, 전망을

제시하는 정치를 지향하는 미디어인 것이다. 대안미디어는 대안

혹은 급진적 관점의 도구라기 보다는 이러한 대안적 생산물의 생산과

분배를 통해 수용자들의 사회적 참여를 확장시키는 조직화 기능을

수행한다. 즉 미디어 제작과정에서 제외되었던 사람들에게 민주적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제공하는 것, 탈전문화, 탈자본화, 탈제도화의

핵심을 갖춘 것이면 대안미디어로 분류한다.

(각주 한국의 대안미디어 28쪽, 유선영, 한국언론재단2005)

 

이주노동자방송국은 자원활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고 있다. 대표와 편집국장을 제외한 활동가들이 모두 이주여성과 이주노동자들이며, 방송국 운영팀은 미디어에 능숙하지 못한 이주노동자와 이주여성들이 미디어의 주체가 되어 참여할 수 있도록 지금 까지 총 4회에 걸쳐 미디어교육을 실시하여 왔다.

 

미디어 교육은 이메일 보내고 인터넷 활용 배우기, 이주노동자를 위한 미디어의 중요성에 대한 강의, 기사작성하기,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전문 사진 기자로부터 디지털 사진 촬영 실습, 영상뉴스의 기획과 촬영, 디지털 편집 강의 등이 포함되어 있다. 또 이주노동자방송국이 인터넷 언론이다 보니, 인터넷을 통해 어떻게 정보의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을지 인권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정보운동가와 인터넷 언론인으로부터 교육을 받는다. 이 밖에도 한국어로 이루어지고 있는 정보들을 잘 이해하기 위한 한글 교육도 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방송국 미디어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경일대학교 석성석 교수는 미디어 교육이 무엇보다 '이주노동자와 교육 참가자들이 미디어에 친숙해지도록 도와야 한다’‘는 입장이다. 또한 이주노동자방송국이 인터넷 언론이다 보니 사이트에 접속하고 시민기자로 등록해 기사를 직접 올리는 실습을 더하여 교육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이주노동자들의 참여의식을 높여야 한다고 했다.

 

네팔, 태국, 인도네시아, 버마, 몽골, 베트남, 중국, 우즈베크스탄, 캐나다, 방글라데시 등에서 온 이주노동자와 이주여성 총 40 여명이 미디어 교육을 수료하였고 이후 이주노동자방송국 시민기자로 활동해오고 있다. 물론 방송국의 활동이 급여를 지급하지 않는 자원활동이다 보니, 40 여명의 미디어 교육 수강생 전원이 미디어 교육 이후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있지는 않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였던 이주민의 경우 교육 중간에 또 교육 이후에 단속되어 고향으로 귀국한 경우도 있다. 또 이주여성의 경우 바깥 외출이 쉽지 않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방송국에 나오는데 어려움이 많다. 이주노동자들이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권리와 의무가 동시에 요구된다. 이주노동자들이 전문적인 기술을 키우고, 어떤 올바른 메시지를 전할 것인가를 스스로 고민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미디어 교육 사업은 방송국의 핵심 사업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제 1회 미디어 교육을 수료하고 현재까지 이주노동자방송국 버마 관련 영상뉴스 전문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조나잉씨는 버마 민주화를 위해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NLD한국 지부 당원이며, 현재 정치적인 망명을 신청해 놓은 난민이다. 그는 주로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버마인들의 버마 민주화지지운동을 취재해오고 있다. 제 1회 미디어교육을 수료한 태국 이주여성 쥴리아씨는 한국에 거주하는 태국 근로자들을 위한 통역과 상담을 해오고 있는데, 이들을 위해 긴급하게 필요한 이주노동자 관련 법규와 정보를 이주노동자방송국 다국어 라디오를 통해 현재까지 알려주고 있다. 제 1회 미디어교육을 수료한 네팔인 비제구릉씨는 이주노동자들이 노동자로서의 권리 쟁취를 위한 활동을 밀착하여 취재하고 있다. 또한 재한 네팔인들의 공동체 소식도 영상뉴스로 전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방송국의 활동가들은 모두 4회에 걸쳐 진행된 방송국 미디어 교육을 통해 전문적인 기자로 거듭났으며, 자신의 목소리를 한국 사회에 전달하는 뉴스의 생산자가 되었다. 2006년 2월 시작된 이주노동자방송국 다국어라디오 방송 또 오는 12월 7일 개국하는 다국어 사이트 모두 이주노동자방송국 미디어교육을 수료한 이주여성과 이주노동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지고 있다. 현재 한 개 국어 사이트에 조직된 활동가는 2-5명이며, 활동가들 모두 평일에는 직장에서 근무하고 주말이나 휴일에 중점적으로 방송국 활동을 한다.

 

이주노동자방송국이 무급의 자원활동가들의 조직으로 운영되다 보니, 활동의 한계도 갖고 있다. 우선 미디어를 배우고 처음 활동을 할 때는 미디어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충족하기 때문에 꾸준한 활동을 하지만, 짧게는 3개월에서 1년 정도의 기간이 지나고 나면, 활동을 중단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본래 미디어 교육을 받은 이주노동자와 이주민이 일정 기간 동안 활동을 하고 취재 활동에 능숙하게 되면 이후에 방송국의 문을 두드리는 후배 이주민들에게 자신의 노하우를 제공하고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처음에 미디어 교육을 받을 때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한다해도 이 약속이 지켜진 경우는 거의 없다.

 

결국 방송국 운영진이 지속적으로 활동가를 교육하고 기간이 흐른 뒤 활동이 중단 된 경우 처음으로 돌아가 새로운 활동가를 교육하여야 하는 상황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이는 상당히 소모적인 싸움이다. 한 명의 올바른 활동가를 키워내는데, 적어도 6개월에서 1년의 기간이 필요한데, 이 시민기자가 빠져나간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또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주노동자방송국의 미디어 교육은 미디어 제작과정에서 소외되었던 이주노동자들에게 민주적 커뮤니케이션 수단인 미디어의 생산자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으며, 이들이 만들어낸 뉴스가 한국 사회의 주류 미디어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지녔다는 점은 부정될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방송국의 역할은 10년 안에 분명히 평가받게

되어있다. 왜냐하면 한국도 이제는 다문화 공동체 사회가 되고 있으며

10년 안에 이들이 자신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목소리를 더욱 높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자신의 주장을

올바르게 펼치려면 이주노동자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가진, 더 나아

가서는 이들이 주인이 되어 이끌어가는 ‘독립 미디어’가 꼭 필요하다.

결국 이주노동자방송국은 앞으로 다가올 다문화 공동체 사회를 미리

준비하는 이주노동자와 이주민을 위한 독립 미디어로 성장해야 한다.

(이주노동자방송국 네팔인 활동가, 2006)

 

이주노동자방송국이 이주민의 정치적 목소리를 대변하는 미디어로 성장하여야 한다고 이주노동자방송국 네팔인 활동가는 말하고 있다.

 

 

이주민에 대한 내국인들의 편견과 맞서다

 

지난 2005년 5월 18일 개국한 이주노동자방송국은 개국 초기부터 대안언론으로서 이주노동자방송국의 역할이 주류언론이 보도하지 않는 영역을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어 사이트는 비록 한국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주민들에게는 유용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이주민 문제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는 관련 이슈를 자세히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개국 이후 지난 2년 반 동안 한국어 사이트가 다루었던 뉴스는 이주노동자의 노동권, 문화활동, 이주여성, 이주민 공동체 소식, 사건과 사고 등 참으로 다양했다. 이주노동자가 직접 라디오를 진행하며 이주노동자 관련 뉴스들을 각 나라 음악과 함께 소개하기도 했는데, 인터넷으로 진행되고 있는 이주노동자방송국 라디오는 대안언론에서는 유일하게 아시아의 다양한 음악을 접할 수 있는 방송이기도 하다.

 

한국어 사이트가 가장 소중하게 취재한 기사는 ‘이주노조의 아노아르 초대 위원장 석방 투쟁 밀착 취재’와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 밀착 취재’이다.

 

아노아르 위원장 석방 투쟁의 밀착 취재의 경우 아노아르 위원장이 서울 출입국에 의해 표적 단속을 당하여 청주 외국인보호소에 수감되면서부터 1년 후 보호소 밖으로 일시보호해제로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놓치지 않고 밀착 취재하였다. 아노아르 위원장 밀착 취재의 경우는 이주노동자방송국이 갖고 있는 다양한 네트워크를 통해 ‘노동부의 허가를 받지 못한 불법 노동조합의 초대 위원장인 불법체류자 아노아르 후세인을 출입국이 연행했다’는 일반 사건 보도와 다른 방향의 접근을 시도하였다.

이주노동자방송국은 아노아르 후세인이 어떤 인물이며 그가 왜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의 초대 위원장이 되었으며, 왜 고향으로 출국하지 않고 청주 외국인보호소의 수감 생활을 견뎌내고 있는지 보도하는데 중점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또 이주노조가 아노아르 위원장 석방을 위한 1인 시위와 집회를 할 경우에도 꼭 현장으로 가서 취재를 하였다. 이주노조가 관련 기관을 항의방문하고 국가인권위점거농성을 할 때도 현장에 기자가 상주하였다.

 

특히 라지브 나라얀 국제 엠네스티 조사관이 한국의 이주노동자 인권상황을 조사하러 나왔을 때에는 조사관과 함께 청주 외국인보호소에 수감 중인 아노아르 위원장을 면담하여 보도하였고, 아노아르 위원장이 반인권적인 보호소의 실태를 고발하는 편지를 이주노동자방송국으로 보내오면 이를 번역하여 단순히 방송국의 기사로 사용하기 보다는 타 언론사와 단체에 발송하여 이주노동자 문제의 심각성을 외부로 알리려 노력하였다. 이주노조 아노아르 위원장이 보호소에서 일시보호해제로 나왔을 때에는 가장 가까이서 취재했던 미디어로서 가장 큰 보람을 느꼈다.

 

이주노동자방송국이 아노아르 위원장의 석방 투쟁을 다른 미디어 보다 더 신속하게 보도할 수 있던 것은 이주노조 활동가들과 인적인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청주 외국인보호소 수감 중인 아노아르 위원장으로부터 수시로 전화가 와 석방을 위한 활동의 진행을 보도자료가 나오기 전에 알 수 있었다. 이주노동자방송국은 아노아르 위원장의 표적연행이 단순한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이 아니라 한국 정부의 이주노동자 노동조합에 대한 노동탄압이라는 기본적이 취지를 갖고 보도에 임했다.

 

아노아르 위원장이 석방 후 보여주었던 종이 여러 장의 메모지에는 관련 단체와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빽빽하게 적혀있었다. 아노아르 위원장의 석방이 가능했던 것은 아마도 그가 보호소 안에서 수십 번 느꼈던 자살충동을 극복하며 외부와 소통하려 끊임없이 노력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또 보호소 밖에서 이주노조 활동가를 비롯한 관련 단체들의 노력과 이주노동자방송국과 같은 미디어들이 청주 현지의 아노아르 위원장과 상시 소통하면서 바깥 세상으로 뉴스를 생산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여 진다.

 

비록 승리하는데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승리했던 아노아르 이주노조 위원장 석방 투쟁과는 다르게, 지난 2월 11일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는 10명의 무고한 이주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법무부의 일방통행으로 사건이 수습되었다.

 

이주노동자방송국은 화재가 발생한 날 당일 여수 현지에 기자를 파견하였고 이후 2월 17일부터 3월 말까지 여수 성심병원 합동 분향소에 기자를 파견하였다. 아노아르 위원장의 석방투쟁이 관련 단체들 사이에서 정보가 잘 소통되었던 반면에 여수 성심병원 합동 분향소에서 목격된 상황은 관련 단체들 사이의 이견으로 정보가 잘 소통되지 않아, 미디어 활동가로 현지에 머물고 있는 이주노동자방송국 파견기자의 취재는 법무부가 아니라 관련 단체들과 유족들에 의해 거부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현지의 활동가들은 대안 언론 기자로서 시민단체와 유족의 입장을 잘 전달할 수 있도록 현지로 내려간 이주노동자방송국 기자의 취재에 방어선을 폈다. ‘왜 취재를 가로 막느냐’는 이주노동자방송국 측의 질문에는 ‘너희들이 활동가냐? 기자냐? 본분에 충실해라’는 답변이 오기도 했다.

 

유족들이 모두 떠나고 나서 동포 출신 유족들이 3개월 안에 방문취업제로 재입국하는 것으로 법무부와 관련단체, 그리고 유족 당사자들이 이주노동자방송국에 감추려했던 진실이 무엇인지 세상에 드러났지만, 한국에 재입국하여 전화를 걸어온 유족들의 반가운 목소리가, 철창 속에 갇힌 이주노동자 인권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주노동자방송국이 여수 현장에서 쓴 100편이 넘는 기사들은 모두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의 진실을 한국 사회에 보여주지 못했다. 우리는 여수에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론

 

여수 외국인 보호소 화재참사가 일어난 지 벌써 일 년이 다 되어 간다. 여수 현지에서 유족들이 배상금 1억 2천만원을 받고 장례식을 하기로 법무부와 합의한 다음 날, 여수의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매년 2월 11일을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 기념일로 정해, 환자나 유족들과 함께 기념식을 하면 좋겠다” 고 한 적이 있다.

여수의 진실은 베일에 가려진 채, 무엇을 기억하기 위해 기념식을 한단 말인가!

 

이주노동자방송국에게는 여수에서 겪었던 취재 실패 경험이 쓴 약이 되었다. 이주노동자방송국이 이주노동자와 이주민의 목소리를 한국 사회에 전달하는 대안미디어로써 관련 단체와의 네트워크를 잘 활용하여 좋은 기사, 꼭 필요한 뉴스를 생산하여야 하겠지만, 이주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일하는 단체라 하더라도, 정보를 특정 단체의 ‘소유물’로 여기는 경우가 있다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한국인들이 중심이 되어 그물망처럼 엉켜있는 이 정보망에서 한국어에 낯설고 한국 사정에 어두운 이주민들은 정보에 대한 소유는 고사하고 공유조차 주장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해 개탄한다.

 

이주민 대안언론이자 이제 자신들의 모국어로 운영되는 다국어 사이트 개국을 앞 둔 이주노동자방송국이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지난 9월 이주노동자방송국 이주여성 기자들이 기획취재를 하면서 겪었던 한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지난 9월 태국 이주여성들이 마사지 업소에서 겪는 인권유린에 대하여 방송국에서 기획취재 할 때 벌어진 일이다. 신문발전위원회 기획취재지원금을 받아 진행된 이번 이 취재는 이주노동자방송국 이주여성 활동가들이 몇 개월간 어떻게 보도하여야 할지 고민하여 시작한 기획취재였다. 우리는 마사지 업소에서 성매매를 강요당한 한 이주여성의 제보전화를 받았고, 그녀는 우리가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취재해 줄 것을 원했다. 그런데 피해 당사자가 취재를 원하는데도 우리는 취재를 할 수 없었다. 바로 그녀를 보호해주고 있던 한 단체에서 취재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단체의 담당자는 오로지 ‘누가 이러한 정보를 주었는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취재원을 보호하여야 하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는 우리 쪽의 대답은 듣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그녀의 본국에서 가족들이 연락을 했고 그래서 알게 되었다고 해도 믿지 않았다. 담당자와의 긴 전화통화는 어떤 취지에서 이 기사가 중요한지 보다는 어디에 취재원을 숨겨놓았는지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었다. 결국 우리는 취재를 포기해야 했다.

 

지금까지 이주민 관련 정보는 한 가지 언어로만 되어있었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그 정보의 소유자 노릇을 해왔다. 한국에 이주노동자가 들어와 함께 산지 20여년이 되어간다. 이들은 그냥 노동력만을 갖고 들어온 것이 아니다. 이주민과 이주노동자는 자신의 고유 언어와 문화를 갖고 들어왔다. 그러니까 한국 사회는 이미 20여년 전부터 다중 언어 사회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국어 뉴스들이 이주노동자와 이주민의 입에서 입으로 이미 20년 동안 전해지고 있었다.

 

이주노동자방송국 다국어 사이트가 지난 20년 동안 이주민의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던 많은 정보와 뉴스들을 세상으로 꺼내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Please reload

Featured Posts

박경주 개인전 Solo Exhibition

1/10
Please reload

Recent Posts

July 31,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