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를 테마로 한 나의 작업

May 3, 2004

 

베를린에서 만난 이주노동자 (1999)

 

 

1999년 “참석인” 작품의 제작을 시작할 당시에는 내가 표현해보고자 하는 테마가 이주라는 구체적인 생각은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외국인으로서 생활하면서 내가 본 차별에 대항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작품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베를린에서 만난 외국인 노동자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보고자 했다. 촬영장소는 베를린 출입국관리사무소로 정했다. 베를린에 거주하는 외국인이라면 누구나 거주허가 문제로 이곳을 방문해야하는데 이때 외국인으로서 느끼는 모멸감은 독일생활 전체에서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기 때문이다. 외국생활에서 우리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분명해지는 것은 바로 이 곳을 방문할 때이다. 나는 매일 베를린 출입국관리소를 방문했다. 그리고 이곳을 방문하는 이주노동자들을 사진에 담았다. 촬영방법은 몰래 찍는 방법보다는 그들에게 포즈를 취해줄 것을 요구하는 방법을 택했다. 포즈를 취하는 행위는 카메라 저편의 미지의 관찰자를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달 정도 출입국관리소가 문을 여는 시간에 맞춰 촬영하러 갔고 처음에는 사람들을 섭외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지만 나중에는 많은 사람을 섭외 할 수 있었다. 초상권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나는 엽서 크기로 인화한 사진을 나중에 우편으로 본인들에게 보내줬다.

 

 

베를린에서 만난 파독간호사와 파독광부 (1999-2000)

 

 

“참석인“의 제작 이후 나는 재독한인들을 사진에 담아보고자 했다. 독일에는 이미 1960년대 이후 많은 수의 한국인 이주노동자들이 생활하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독일인이 하기 싫어하던 직업인 간호사와 광부로 독일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아무리 독일이 다인종, 다문화국가가 되어가고 있어서 흔히들 이야기하는 “Multi Culti"사회가 되었다고 해도 아직도 이민자, 망명인, 이주노동자에게는 냉정한 사회다. 그래서 결국 같은 민족끼리 모여 살게 되는데 한국인들도 마찬가지다. 작품제작을 위한 자료수집과 한인들과의 접촉을 위해 나는 우선 사단법인 베를린 한인회에서 사무장으로 근무했다. 작품 중 재독간호사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사무장 직책을 마치는 2000년 12월 한인회 주최 송년회 장소 한쪽 귀퉁이에 내가 마련한 셋트에서 촬영한 것이다. 파독광부의 현재의 모습을 표현한 비디오 설치 작품 ‘독일의 기억’도 사무장으로 근무하면서 만난 분들을 인터뷰한 비디오가 포함되어 있다.

 

 

한국에서 만난 이주노동자 (2001-2003)

 

 

2000년 잠시 한국에 귀국했을 때의 일이다. 한 택시운전사 아저씨로부터 외국인노동자가 많이 사는 공단 근처에는 잘 가지 않는 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때 나는 베를린에서 내가 느꼈던 분노와는 다른 색깔의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수치심이었는데 며칠동안 그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전까지 나는 자신을 피해자로서만 인식해 왔으나 아저씨의 말을 듣는 순간 나도 가해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 부끄러운 기억이 나에게 한국의 이주노동자의 모습을 작품에 담아보게 만들었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를 섭외하는데는 베를린에서보다 더 어려움이 많았는데 우선 한국에서는 내가 내국인의 입장이되어 그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다는 점이 그것이고 두 번째로는 한국이 아직 이주노동을 합법적으로 허락하지 않고 있어서 대부분 미등록 외국인의 신분으로 지내다보니 외부로 노출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사진을 촬영한곳은 외국인노동자를 위한 무료의료지원이 이루어지는 곳이고 섭외는 즉석에서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묻는 방법을 택했다.

 

이전까지의 나의 작업이 주로 작가로서 그들을 만나고 인터뷰하는 작업이었다면 이주노동자 뮤직프로젝트- What is life는 이주노동자와 함께 작업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음악이란 장르를 선택한 이유는 미술에 비해 더 일반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과 음반이 제작되어 배급될 경우에 더욱 파장 효과가 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외국인 노동자는 우리 사회의 언더문화를 이루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 중 대부분이 불법 체류자의 신분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도 있지만 한국 사회가 아직 까지는 문화적으로 다원화되지 못해 그들의 문화를 주류 문화로 끌어들이지 못해 그들을 언더 중의 언더 문화로 머물게 만들고 있다고 본다. 이 프로젝트는 이주노동자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아울러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역량을 한국인에게 알리는 것이 그 목적이다. 이를 통해 일반인들이 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문화적 편견을 교정해 줄 수 있다고 본다.

 

 

이 프로젝트는 이주노동자가 직접 가사를 쓰고 여기에 전문 작곡가가 곡을 부쳐 만든 곡을 이주노동자뮤직밴드 유레카가 연주한다. 유레카는 프로젝트 진행과정에서 발굴한 이주노동자 인디 밴드다. 이들은 일이 없는 공휴일에 모여 음악활동을 하고 지난 몇 년간 공동체를 중심으로 음악활동을 해오고 있었는데 아직까지 자신의 곡이 없었다. 이 프로젝트를 계기로 이들에게 자신의 노래를 만들고 이를 음반으로 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밴드의 음악적 수준을 한 단계 진보할 수 있도록 했다. 음반은 제작되어 배포 될 예정이고 타이틀곡으로 뮤직비디오도 제작했다. 음반발매 기념공연은 곧 밴드 유레카의 공식 데뷔공연장이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이주노동자를 위한 노래를 만드는 것에 한정되지 않고 더 나아가 외국인노동자로 결성된 밴드를 데뷔시킴으로서 이들이 정식 음악인으로서 첫 걸음을 내딛도록 한다. 이를 통해 이주노동자가 그들의 목소리로 자신들의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뮤직비디오 “What is life"는 내가 1년여 동안의 준비기간을 거쳐 제작하고 있는 이주노동자 음악 프로젝트의 결과물 중 하나다. 이주노동자에게 직접 가사를 공모하여 얻은 가사에 작곡가가 곡을 붙이고 이것을 이주노동자 밴드-유레카-가 노래한 곡을 가지고 이주노동자 밴드가 직접 출연하는 뮤직비디오를 만든 것이다. 뮤직비디오는 밴드의 연주 모습과 일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주여성의 삶 (2004- )

 

 

2003년 한 해 전체 결혼 건의 10%이상이 국제결혼가정인 것으로 집계되어 그 동안 서구의 문제로만 치부했던 다양한 문제들이 한국 사회에도 곧 현실로 드러날 것을 예고하고 있다. 최근 교통이 혼잡한 서울시내 도로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베트남, 필리핀 처녀와 결혼하세요’ 라고 쓰여진 프랭카드다. 결혼중계업자를 통해 한국남성을 소개받은 타국의 여성들은 한국에 입국하여 결혼생활을 하면서 한국사회의 문화적 배타성과 가부장주의에 부딪쳐 원만한 결혼생활을 꾸리기 힘든 경우가 많다. 이들과 달리 미등록(불법) 상태로 결혼 생활을 구려나가는 이주여성들도 직장생활과 사회활동에서 남성이주노동자와는 다른 문제에 직면하게 되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은 한국사회가 가지는 남성중심주의로 인해 차별을 받게되는데 성폭력, 성희롱, 성매매, 가정폭력, 모성보호와 육아지원의 부재, 남성보다 많은 장시간 노동과 그에 반하는 저임금 등 여러 가지 고통을 혼자 몸으로 감당해야하는 어려움에 처해있다. 2004년 현재 국제결혼가정과 모성보호를 받아야하는 가정을 중심으로 이주여성의 삶을 일정기간동안 밀착 취재하여 한국사회에서 이주여성이 겪는 아픔을 카메라에 구체적으로 담아보고자 했다.

 

 

소통

 

지금까지 간략하게 1999년부터 2004년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작업해온 이주를 테마로 한 사진작품과 비디오작품 그리고 음악프로젝트, 그리고 최근에 진행중인 작업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보았다. 나의 작품의 모티브는 “이주” 다. 나는 이것을 통해 문화와 문화간의 소통, 계층과 계층과의 소통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보고자 한다. 나에겐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작가와 작품의 제작을 위해 만나는 대상과의 소통이 제일 중요하다. 특히 나의 작업은 일반인들을 만나면서 풀어나가는 과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참석인의 경우 베를린 출입국관리소 앞에서 즉석에서 사람들을 교섭해야 하기 때문에 작가가 낯선 사람들에게 어떤 의도로 접촉을 시도하는지 분명하면서도 거부감을 주지 않는 방법으로 소통하려 했다.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을 작품에 표현한 독일의 기억과 파독간호사 사진작품을 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유학생으로 간 내가 교류하고 있는 집단과 재독한인 집단은 다소 이질적이기 때문에 인터뷰에 응할 사람과 사진의 모델을 섭외 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한인회에서 사무장으로 8개월 간 근무하면서 우선 한인들과의 친분을 쌓은 다음에야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이주노동자를 섭외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외국인노동자 관련 단체에서 자원활동을 하고서야 내가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작품 제작을 시작할 때는 여러 가지 정보가 필요해서 각 집단을 찾았지만 일단 그 집단에서 여러 가지 체험을 하다보면 이런 작업을 하는데 자료- 특히 나에겐 내가 섭외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이름과 연락처가 필요했다-가 별로 중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실감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리스트만 준비되면 작품을 완성할 수 있다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진행과정에서 처음 가졌던 작품의 의도는 많이 수정되고 보완될 수 있어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사람들을 만나고 소통하는 과정은 중요하다.

 

1999년 작품을 제작할 때 나는 베를린 출입국관리소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진사 역할을 했다. 2000년에는 사단법인 베를린 한인회의 사무장 역할을 하면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사람들을 인터뷰했고 2001년 한국에 귀국해서 다시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지금은 이주노동자 음악 프로젝트 기념음반 제작자로 밴드의 메니져 역할도 했으며, 지금은 이주여성의 삶 속으로 들어가 가부장 사회에서의 이주여성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여과 없이 보여주고자 밀착취재 중이다. 내 작업은 사회적인 컨텍스트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작품 제작과정에서 얻어지는 이러한 여러 가지 다양한 체험들이 완성된 작품보다 나에겐 더욱 값지다. 네 개의 벽면으로 밀폐된 작업장을 떠나 세상 속에서 다양한 집단 속으로 들어가 얻어지는 직접적인 체험이 소중하기 때문에 나는 당분간은 소통에 대한 탐구를 계속할 생각이다. 

- ​2004년 5월 박경주

 

 

 

Please reload

Featured Posts

박경주 개인전 Solo Exhibition

1/10
Please reload

Recent Posts

July 31, 2019

January 28, 2019

May 17, 2018